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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원인은?

by 향긋한커피 2021.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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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무력 분쟁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세계 국가에서는 이들 지역에 대해서 여행 자제 권고까지 내려고 있는 상황인데요. 이 둘은 이러한 무력 분쟁을 하는 원인은 무엇을까요?

 

2021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모습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모습

 

 

역사적 배경

일단 역사적인 배경을 알아야 이 분쟁의 원인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시대 이후 로마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은 서기 70년과 135년 두 차례에 걸쳐 독립 투쟁을 벌입니다. 그러나 이는 실패로 끝나죠. 이후 전세계에 흩어져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 유럽을 중심으로 반 유대인 운동이 전개됩니다. 유대인들은 이에 대응하여 '시온주의'라는 조국 건설을 목표로 하는 민족주의 운동을 벌이게 되면서 옛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을 위함 통치하고 있던 영국은 이 지역의 아랍인들에게 아랍국가 건설을 약속해 놓고 1917년 발포아 외무장관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시오니즘을 지지한다'라고 선언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팔레스타인 문제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1948년 이스라엘 국가를 재건하면서 인접 아랍국가들과의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미 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랍인들은 난민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고 이들 난민들은 지중해 연안의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이스라엘과 레바논 국경지대 등지에 흩여져 살면서 1964년 야세르 아라파트를 의장으로 하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조직하게 되면서 이스라엘 투쟁운동을 벌이기 시작했고 이 지역은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을 비롯해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1982년 2일 전쟁을 겪으면서 분쟁의 중심지가 됩니다.

 

 

 

미국의 중재

이 분쟁은 1993년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PLO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오슬로 협정을 체결해 평화 협상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듬해 5월에는 카이로 협정에서 이스라엘의 점령지내 가자지구와 예리고 지역에 팔레스타인의 자치권을 인정했으며 그해 7월 PLO는 자치정부의 수립을 공식 선언하게 됩니다.

 

1988년에는 '와이 리버 협정'을 체결, 이스라엘은 1967년 6일 전쟁 때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을 단계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자치정부로 넘기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 행위를 중단키로 합의합니다. 그리고 '와이 리버 협정' 후속 조치로 평화를 위한 최종 협상을 시작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우익 정당 리쿠드당의 아이엘 샤론 당수가 동예루살렘의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공동성지인 알아크사 사원을 방문한 직후 팔레스타인 시위대와 이스라엘 경찰간의 충돌이 분쟁으로 격화됩니다.

 

 

분쟁의 쟁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해서는 '동예루살렘의 주권을 누가 가져가냐'입니다. 유엔은 지난 1948년 이스라엘 독립 당시 '동예루살렘은 국제관할 아래 둔다'고 결정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때 이곳을 차지하게 됩니다. 동예루살렘이 문제가 되는 것은 동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3대 성지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성지로는 예수무덤성당과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유대교의 대표적인 성지로는 통곡의 벽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폐허가 되고 남은 성전 외벽입니다. 이슬람교의 성지는 통곡의 벽 위쪽 언덕에 있는 바위 둠과 알 아크사 사원이 있습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승천했다는 곳으로 이슬람 4대 성지 중 한 곳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어느쪽도 동예루살렘에대한 주권을 내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한 최종 협상이 실패로 끝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황청은 동예루살렘 문제를 '국제적으로 보장된 특별 지위를 부여하자'라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아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알아크사사원
알아크사 사원

 

분쟁의 중심 알아크사 사원

알아크사 사원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이 장악한 동예루살렘의 옛 시가지 남쪽에 있습니다. 사원이 위치한 약14만㎡ 크기의 지역은 '하람 알-샤프리(Haram al-Sharif) '성전산'(Temple Mount)'으로 불리는 이슬람교와 유대교, 기독교의 성지입니다.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가 큰 바위에서 승천해 천상 여행 체험을 한 곳으로 무슬림들은 믿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곳은 메카, 메디나와 함께 이슬람권의 3대 성지로 불립니다.

 

유대교도 알아스 사원을 성지로 여깁니다. 고대 유대교 성전이 세워졌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이 이곳에 세운 성전은 바빌로니아 왕국에 의해 파괴되었고 같은 자리에 다시 세운 성전은 1세기경 로마제국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알아크사 사원 서쪽의 구시가지를 둘러싼 서쪽벽 일명 통곡의 벽을 로마 제국 때 파괴된 성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 요르단의 일부였던 사원을 포함한 동예루살렘을 장악했고 이후 서예루살렘과 병합해 오늘날의 수도 예루살렘을 만듭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위사원
바위사원

바위사원 관리권

황금색 돔 형태의 바위 사원은 알아크사 사원과 가까우며 관리권은 1994년 체결된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평화협정에 따라 요르단이 주도하는 이슬람 종교재단 '와크프'가 가지게 됩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들도 사원을 방문할 수 있지만 사원 경내에서 기도할 수 있는 건 무슬림들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산 바깥쪽 서쪽벽에서만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유대인들은 동예루살렘 점령을 기념하는 '예루살렘의날' 행사를 매년 열면서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구시가지 주변을 행진합니다.

 

팔레스타인들이 가만히 있을 일이 없죠. 동예루살렘을 미래의 수도로 간주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유대인들의 도발이라며 불만이 시작됩니다. 일부 유대인들은 의도적으로 사원을 집단 방문해 갈등을 유도하기도 하며 대표적인 사례가 2000년 아이엘 샤론 전 종리의 돌발입니다. *팔레스타인 시위대와 이스라엘 경찰간의 충돌이 분쟁으로 격화 시작

 

이이엘 샤론 전 총리의 도발

당시 야당이었던 우파정당 리쿠드당의 지도자였던 샤론은 사원을 기습적으로 방문합니다. 제2차 팔레스타인 주민의 반 이스라엘 저항운동(인티파다)가 촉발됩니다.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상황

올해 라마단 기간 이스라엘 당국은 이슬람교들이 단식을 끝낸 뒤 모여 저녁 시간을 보내는 구시가지 북쪽의 다마스쿠스 게이트 광장을 폐쇄해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반발을 받게 됩니다. 또 알아크사 사원에서 2km 떨어진 셰이크 자라의 정착촌 갈등과 관련해 이곳에 오래 살아온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쫒아내기도 해 갈등을 키우게 됩니다.

여기에 10에는 알아크사 사원 경내에 경찰병력을 진입시켜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강경 진압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알아크사 사원의 주권을 두고 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위험하다보니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이곳에 대한 여행 자제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갈등이 쉽게 해결될 것으로 보여지지 않지만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되는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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